반공포로가 죽음으로 싸워 얻었던 ‘자유’를 아십니까?

칼럼/인터뷰 / 장순휘 정치학박사 / 2019-06-13 18: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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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들이 서울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다. 정확한 시점은 미상. (사진제공=뉴시스, 출처=미국 국립문서보관청)

[스페셜경제=장순휘 정치학박사] 6월 18일이 어떤 날인가를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날은 1953년 6월 18일 00시에 있었던 ‘반공포로 석방의 날’이다. 


이 날은 6.25전쟁사에만 있는 특별한 역사의 날이기도 하지만 기억하는 행사는 없다. ‘전쟁포로(POW : Prisoner In War)’라는 것은 사전적으로는 “전투에서 사로잡힌 적의 군사(a member of the armed forces captured by the enemy during a war)”이다.

포로에 대한 실질적인 의미를 파악하려면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이하 제네바 협약)’을 살펴봐야 한다. 제네바 협약은 1929년 7월 27일 제정돼 1949년 8월 12일 조인됐고, 1950년 10월 21일 발효됐다.

우리나라는 1966년 8월 16일 (조약 제217호) 공식적으로 발효했다. 제네바 협약 제1편 총칙 제4조는 ‘①충돌당사국의 군대의 구성원 및 그러한 군대의 일부를 구성하는 민병대 또는 의용대의 구성원’으로서 적의 수중에 들어간 자를 전쟁포로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6.25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 사이에 발생한 쌍방의 구성원을 ‘전쟁포로’로 적용할 수 있다.

제네바 협약 제4편 제2부(적대행위 종료 시 포로의 석방과 송환) 제118조에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명시돼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휴전협정체결 후에는 억류국이 포로 소속국으로 지체없이 송환하도록 규정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산포로들 중 대단히 많은 숫자가 북한 또는 중공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송환거부’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공산권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의 포로를 ‘친공포로’라 하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반공포로’하고 부르게 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포로집단이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반공포로’라는 의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포로’라고 할 수 있는데 공산주의를 위해 싸웠던 자가 그 공산주의를 배신하는 꼴이 된 것이다.

공산군 포로 자신들이 참전하여 싸웠던 북한을 버리고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로 돌변한 사태는 고향 북한에 부모형제, 일가친척, 처자식을 두고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은 사상문제와 인간본능을 초월한 ‘자유(freedom)’라는 인도주의적 기본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외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반공포로의 집단적 발생은 공산군측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국제적인 망신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포로교환협상’이 난항을 반복했고, 정전협정체결까지 2년여 간 걸림돌로 작용했다.

다행스럽게도 유엔군측은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면서 반공포로를 강제적으로 송환하려 하지 않았고, 제네바 협약문에서 ‘포로교환은 의무적이 아니다’라는 해석과 ‘전쟁포로는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규정을 적용해 공산측의 무조건 전원 송환요구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27,388명(6.25사변후방전사/육본)의 반공포로들은 북한공산치하로 끌려가서 집단학살을 당했을 것이니 이를 상상만해도 1953년 6월 18일 단행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조치가 얼마나 위대한 결정이었는지를 알 것이다.

1953년 들어서면서 미국와 유엔군측의 전쟁휴전협상이 속도를 내면서 졸속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강력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힘이 없었다. 당시 포로교환문제만도 유엔군측이 공산측에 설득되어 끌려가는 양상인 것을 감지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의 결심을 해서라도 친공포로와 싸우는 반공포로에게 자유의 삶을 주려고 탈출시킨 운명의 날이 바로 6월 18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미군 병참관구사령부(KCOMZ)가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군은 경비부대와 헌병을 파견해 수용소의 외곽경비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OPCON)이 유엔사에 이양됐기 때문에 대통령의 명령이라도 포로석방은 불가한 것이었지만,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 전격적으로 단행된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행위로 이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도 걸린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도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대탈출’의 가능성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면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방지대책이 불가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6월 18일 00시 반공포로 석방조치는 유엔사의 묵인으로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에 대한 인도주의적 결심이 단행된 전쟁에 핀 아름다운 꽃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민족의 큰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결단이 맞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인민군 해방구’였다. 미군의 경계순찰을 피해서 24인용 텐트안에서는 인민재판이 수시로 열렸고, 반공포로로 지목된 포로들은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한 체벌로 초죽음이 되었거나 시체가 됐으며, 심지어 사체는 통조림으로 급조된 칼로 난도질이 돼서 대변구덩이에 몰래 버려졌다는 것이다.

평시에도 친공포로와 수시로 충돌했고, 투석전과 비방전 등 그야말로 거제도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전장터였으며, 반공포로들이 강제송환반대를 위해 혈서진정, 분신자해 등 자유를 찾고자 투쟁했다는 증언을 본다면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로운 삶이 반공포로에게는 죽음으로 싸워서 얻어야했던 고귀한 가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한다.

반공포로들은 밤마다 광란처럼 일어나는 포로살육행위를 목격하면서 공산주의에 염증과 공포 그리고 잔혹함에 반공대열로 전향을 결심했다.

그들의 선택으로 자손들에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즐기며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반공포로라는 낙인(烙印) 때문에 불편한 삶을 살았어도 평생 그 선택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졌고, 그리고 반공포로에게 자유를 준 이승만 대통령에게 늘 존경하고 감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자유는 그런 용기로 얻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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